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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ugust 17, 2020

골목식당 나온 그 집 말고, 옆집을 가는 이유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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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일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내의 수행을 돕는 정도가 전부이고 그 일도 대기하는 시간이 많아서 항상 손이 비어 있다. 즉 백수다. '노니 이 잡고 노니 염불한다'고 짬짬이 거제 경기의 부활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거제도에서 영업하는 곳 중, 추천할 만한 곳을 찾아 소개하려고 한다.[기자말]
숟가락으로 잘게 간 돼지고기와 채소를 퍼 먹는 짜장면 면은 젓가락으로, 소스는 숟가락으로 퍼 먹는 짜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 숟가락으로 잘게 간 돼지고기와 채소를 퍼 먹는 짜장면 면은 젓가락으로, 소스는 숟가락으로 퍼 먹는 짜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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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의 위상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에는 특식 메뉴였다가 그 후 한 끼의 식사로 대중화된 뒤, 최근에는 다시 별미 음식으로 대접받고 있는 한국식 중국 음식이다. 영화 <기생충> 덕분에 '짜빠구리'라는 독창적인 갈래가 만들어져 세계인들이 포크로 돌돌 말아먹을 정도이니 짜장면에 대한 한국 사람의 사랑은 특별하다.

베이징 길거리 음식 중의 하나였던 이 음식은 인천항이 열렸던 1883년에 산둥 출신의 화교들이 가지고 들어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장에 돼지고기와 채소를 곁들여 볶아 만드는 이 음식 이름이 '자장면'이 맞는지 '짜장면'이 맞는지 쓸데없는 논쟁을 하다가 2011년부터 둘 다 복수표준어로 인정받았다.

그 때, 짜장면은 축하 요리였다

1960~70년대, 기념일 날에는 흔히 중화요릿집에서 짜장면을 먹곤 했다. 졸업식 후에도 먹었고 생일날에도 먹었는데 곱빼기를 먹어 본 기억은 없다. 당시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릿집이 흔했기에 다들 중국집으로 불렀다. 북경성, 자금성 등 듣도 보도 못한 중국 지명을 딴 음식점도 모두 중국집이었다.

그 후 화교로부터 요리법을 배운 한국 사람들이 독립하여 개업함에 따라 중화요릿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탕수육'이니 '라조기'니 하는 요리 종류는 단지 메뉴판에 적혀 있는 언감생심의 고급 음식에 불과했고 우리는 오로지 짜장면만 먹었다. 우동이나 짬뽕을 먹는 사람은 까탈스러운 별종 취급을 받기도 했다.

배달음식은 짜장면이 유일하던 그 시절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배달하곤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짜장면이 조금 굳은 채 배달되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무젓가락이 부러지지 않도록 굳은 짜장면을 조심해서 비벼 먹는 것이 짜장면의 속성이며 즐거움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고춧가루를 듬뿍 쳐서 먹었고 아이들은 쪽쪽 빨아 먹다가 얼굴에 짜장이 튀었다.

흔히 남은 짜장 소스에 밥을 비벼 먹은 후 찌꺼기가 묻은 그릇을 키우던 개한테 주면 씻은 것처럼 핥아먹어서 따로 설거지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개나 사람이나 짜장면이라면 사족을 못 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양한 코스요리와 짜장면을 더 맛있게 즐길 수 있기에 여건이 되면서 직접 찾아가는 추세로 바뀌었다.

시골 중학생들은 숟가락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만리향 내부, 테이블 2개, 오토바이 2대 태풍 '장미' 다음 날은 휴업일이었다. 오토바이는 실내에 들여 놓고 주방을 정리 중이었다.
▲ 만리향 내부, 테이블 2개, 오토바이 2대 태풍 "장미" 다음 날은 휴업일이었다. 오토바이는 실내에 들여 놓고 주방을 정리 중이었다.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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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인 2007년,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에 소재한 지세포중으로 발령받아 와서 2년 6개월 동안 체육을 가르치다가 교감으로 승진하여 다른 학교로 전근된 바가 있다. 작은 시골 중학교에서는 소규모로 아이들을 인솔하여 대회나 행사를 나가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밥때가 되면 당연히 짜장면을 사 먹였다.

일운면 소재지인 지세포항의 동네 한가운데에 '만리향'이라는 오래된 중화요릿집이 있다. 개업한 지 25년이 된,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다. 상호가 '짜장 볶는 냄새가 만 리를 간다'라는 뜻인지, 그 냄새가 향기이라는 의미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백종원의 골목 식당으로 일약 전국적인 맛집이 된 'O김밥'과 'OO보리밥 집'과는 불과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 맛집에는 젊은 외지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만리향에는 오래된 단골들이 드나든다.

처음 중학생들을 데리고 그 집에 간 날, 아이들은 짜장면이 나오기 전에 식탁에 수저와 물을 가지런히 챙겼다. 시골아이들일수록 자립심이 강해서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스스로 척척 해냈다. 학교 청소나 집안일 돕기도 도회지 아이들보다 어른스럽게 일머리를 챙겨가며 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짜장면을 먹을 때 왜 숟가락이 필요할까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 아이들은 당연히 수저를 챙겨 놓고 기다렸다. 잠시 후 짜장면이 나오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원래 채소와 돼지고기, 춘장을 볶아서 짜장소스를 만든 후 면 위에 얹어 먹는 게
짜장면이기에 당연히 주 음식은 밀가루로 만든 면일 수밖에 없을 것인데, 잘게 간 돼지고기와 채소가 푸짐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숟가락으로 반찬 먹듯이 소스를 퍼서 먹었다.

한 그릇을 먹으면 배가 든든한 것이, 마치 냉면에 고명을 듬뿍 넣어 먹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이치와 같았다. 나도 생전 처음으로 아이들을 따라 숟가락으로 짜장면을 퍼먹었다.

숟가락으로 짜장면을 먹던 아이들은 이제 다 어른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밥벌이하고 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그들이 그곳에서도 숟가락으로 먹는 짜장면을 만났을지 궁금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맛

만리향 주인 내외는 그때나 지금이나 지역의 초, 중학교에 매년 장학금을 기탁하고 있는 것처럼 만리향 짜장면 맛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엊그제 동네 의원에서 만난 여성 사장님은 "이젠 주변에 중화요릿집이 많이 생겨서 매출도 떨어졌지만, 짜장면 맛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라면서 가끔씩 링거 영양제를 맞으러 온다고 말했다.

세월이 가면 사람은 늙어 가겠지만 만리향의 짜장면 맛은 지금처럼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짜장면을 같이 먹던 그 중학생들이 이제 자식들의 손을 잡고 짜장면을 먹으러 올 것인데, 그 시절을 얘기해 줄 때는 짜장면도 그때 그 맛이어야 실감나지 않을까.

"아빠가 너만 할 때 선생님과 같이 맛있게 먹던 짜장면이야. 맛있지?"

물론 입맛 까다로운 요즘 아이가 "네" 라고 대답할지는 자신이 없다.

덧붙이는 글 | 조선산업의 전성기 시절에는 작업복 차림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단체로 이용하기도 했고
휴일에는 가족 단위의 손님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 지금도 그 집의 짜장면 맛을 잊지 못하는 중년들이 자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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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2, 2020 at 11:43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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